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떠나고 남기고] 성철스님 이후 최고 禪師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 "이제 가야겠다" 하시더니 앉은채 열반 간디자서전 읽고 불교접해 고교졸업때 출가

2003년 12월
13일(토요일) 입적한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은 성철(性徹) 스님 이후 최고의 선사(禪師)였다.

스님은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백양사 설선당(說禪堂)에서 아침 죽 공양을 하고 오후에 상좌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며 후학들의 정진을 격려했다. 스님은 저녁에 주지 두백 스님 등에게 “이제 가야겠다”고 말한 뒤 앉은 자세로 좌탈입망(坐脫立亡)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님은 임종 직전까지도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온 시자 호산 스님과 선문답을 주고 받는 선장(禪匠)의 면모를 보였다. 백양사측이 전한 그 모습은 이랬다. 서옹 스님이 일렀다.“호산. 호산. 동서남북에서 눈 밝은 사자새끼가 나온다. 동서남북에서 용맹스런 사자새끼가 나온다. 호산! 속히 일러라. 속히 일러라.”호산 스님이 벽력같이 할(喝)을 했다. 서옹 스님이 말했다.“발 밑을 보아라.”두 사람은 마주앉아 빙그레 웃었다.

191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스님은 양정고보에 다니던 열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한 해에 돌아 가신 데 절망하다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무교회주의자였던 김교신 선생의 영향으로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불교와 접하게 됐다. 주변에서는 경성제대 예과에 갈 것을 권했으나 “인생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1932년 양정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서옹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 한암 스님 문하에서 탄허, 고암, 월하 스님과 함께 본격적 참선 수행을 시작했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에서 2년,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서 운영하는 교토 임제대학에서 2년 동안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파계사 봉암사 등을 돌며 공부와 수행을 계속했으며 62년 동국대 대학선원장을 지냈고 천축사 무문관, 동화사, 봉암사 등의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늘 수좌들에게 “순수하면서도 용맹스럽게 하라”면서 그야말로 목숨을 바치는 듯한 자세로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게 가장 간단하고 병폐도 없다”며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님은 1967년 어느 날 백양사 쌍계루 아래 돌다리 사이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문득 대오하여 전에 없던 초탈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한다.

스님은 74~78년 조계종 5대 종정 재임 때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이후 줄곧 백양사에 주석했으며 96년부터는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으로 후학들을 지도했다.

스님은 특히 말년에 “종교적 생명력이란 허무한 인간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자기 밑바닥에 있는 참다운 인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며 백양사에 참사람 수련원을 개설하는 등 ‘참사람 운동’을 펼쳤다. 4월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찾아왔을 때도 임제 스님의 참사람(眞人) 정신을 강조했다.

스님은 ‘임제록 연의 ’‘선과 현대문명’‘참사람결사문’, 법어집으로는 ‘절대현재의 참사람’‘사람’등의 저서를 남겼다.


임종게

“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 덕산의 한 방은 별전지가 끊어지도다.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가니/ 백학의 높은 봉에 달바퀴가 가득하도다.”

(臨濟一喝失正眼 / 德山一棒別傳斷 / 恁麽來恁麽去 / 白鶴高峯月輪滿)

 

서옹스님 '坐脫立亡' 장면공개

전남 장성 백양사 방장 서옹(西翁) 스님이 13일 밤 좌선하는 자세로 입적(좌탈입망ㆍ坐脫立亡)한 장면이 15일 공개됐다. 밝은 황토색 바지와 적삼을 입은 스님은 왼 발을 오른 발 위에 올리고 오른 손을 왼 손 위에 올리고 있다. 장의위원회는 앉은 모습 그대로 입관해 19일 백양사에서 다비식을 치를 예정이다.

‘좌탈입망’은 참선 수행을 오래 한 선승 가운데서도 드물게 보는 일로 높은 법력(法力)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까운 예로는 지난달 22일 세수 90세로 입적한 태고종 전 종정 덕암(德菴) 스님이 있었다.

덕암 스님은 수행의 경지가 높아 태고종 내에서는 조계종 전 종정 성철(性徹) 스님과 비견되기도 했다. 근세 고승 가운데 오대산 상원사 방한암(方漢巖) 스님의 좌탈입망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서옹 스님의 은사였던 송만암(宋曼庵) 스님도 좌탈입망했다.

 

 

 

 

 

 

 

 

 

 

 

 

 

 

 

 

 

자료출처: 한국일보

 

 

 

“큰 스님 불 들어 갑니다. 빨리 나오세요.”

13일 밤 참선하던 모습 그대로 입적한 조계종 전 종정 서옹 스님의 다비식이 19일 오후 눈이 내리는 가운데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거행됐다. 눈발 사이로 피어 오른 흰 연기를 타고 스님은 이승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조계종 법전(法傳) 종정과 법장(法長) 총무원장 등 스님 2,500여 명과 각계 인사, 신도 등 3만여 명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법전 스님은 영결 법어를 통해 “노승의 진면목은 아득하고 심오하다”고 추모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대독한 조사에서 “대종사께서 남기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가르침을 소중한 좌표로 삼겠다”고 애도했다.

다비식은 낮 12시50분부터 거행됐으며 20일 오후 습골 등의 절차를 거쳐 마무리된다.

사진출처: 국회사진기자단

[중앙일보 기사] 지난 13일 92세를 일기로 앉아서 입적했던 서옹 스님이 19일 평소 자신이 설법하던 우주의 영원한 품에 안겼다.

이날 전남 장성군 백양사에서 3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다비식에서 스님은 처음 그를 만들었던 한줌의 흙으로 되돌아갔다.

조계종 최고의 선승으로 꼽혔던 스님은 생전에 '인생은 등불'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잠시 밝았다가 꺼져버리는 등불에 비유한 것이다.

스님의 엄격한 수행 정신은 유명하다.

화장실에서도 휴지 세칸을 절단해 꼬깃꼬깃 접어 사용할 정도로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밴 것은 물론 일제시대 단절된 위기에 놓였던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 진작하고, 선문(禪門)의 기강을 세우는데 진력했다.

특히 올해는 고인이 생전에 교류했던 성철 스님이 입적한지 10주년 되는 해였다.

서옹 스님은 평소 성철 스님의 사진을 곁에 두고 "저 분이 나보다 몸이 좋았는데 일찍 가셨어"라며 아쉬워했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스님 사리

 

 

지난 19일 다비식을 치른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당(西翁堂) 상순(尙純) 대종사의 법체에서 나온 사리. 4과(顆) 모두 백옥빛을 하고 있으며 2과는 쌀알보다 약간 크고 나머지는 작다.

 

 

완전밀봉 항아리서 사리 나왔다…서옹스님 다비후 4과 나와

 

최근 큰스님들이 잇따라 입적하면서 사리를 남겼다. 사리는 수행력과 무관하다는 것이 불교계의 정설이지만 일반인의 사리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13일 입적한 서옹 스님은 다비 결과 4과(顆)의 사리가 나왔다. 4과는 일견 적은 듯 보이지만 서옹 스님이 주석하던 전남 장성 백양사의 독특한 사리 수습방법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보통 사리는 다비 후 뼈를 모아 곱게 빻을 때 수습하지만 백양사는 별도의 방식을 쓴다.
우선 연화대(蓮花臺) 밑을 1m 깊이로 판 뒤 물을 3분의 2가량 담은 항아리를 넣는다. 항아리 입구를 한지로 막고 다시 뚜껑을 덮는다. 이어 뚜껑 위에 기와 2장을 놓고 다시 3cm 두께로 황토를 덮는다. 황토 위에 10cm 두께의 큰 돌을 올려놓고 다시 20cm 두께로 황토를 깐다. 이 위에 가로 세로 방향으로 기와를 서로 겹쳐 놓는다.
결국 항아리는 한지, 뚜껑, 기와, 황토, 돌로 완전 밀봉되는 셈. 이렇게 다비를 한 뒤 항아리를 개봉하면 그 속에 사리가 들어있다는 것.
백양사 총무국장 진우 스님은 “서옹 스님의 스승인 만암 스님이 1957년 입적했을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8과의 사리를 얻었다”며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사리가 물을 찾아간다고 추측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전남 곡성 성륜사 청화 스님은 1000여과가 넘는 사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월하 스님이 주석했던 경남 양산 통도사의 경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어서 사리를 수습만 하고 공개는 하지 않을 예정. 한 관계자는 “월하 스님은 100과 정도의 사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전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은 200여과의 사리가 나왔으며, 태고종 종정을 지낸 덕암 스님도 200과 이상 수습됐다. 3월에 입적한 서암 스님은 따로 사리 수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경허 스님과 같은 고승도 사리가 나오지 않았다며 사리를 신격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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